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십자군 전쟁/연표/1199년 이후 (문단 편집) == 귀족 십자군 == 앗 살리흐 아이유브 (다마스쿠스 → 카이로) / 앗 나시르 다우드 (케라크) / 앗 살리흐 이스마일 (바알벡 → 다마스쿠스) / 알 만수르 이브라힘 (홈스) * [[1239년]] : 마누일 앙겔로스, 테살리아 장악[* 안탈리야로 축출되었던 마누일은 룸 술탄국의 허락 받아 육로를 통해 니케아 당도. 요안니스 3세에 복종하고 그의 군대로 테살리아의 데메트리아스 상륙. 총독 콘스탄티노스 멜리세노스의 지지 얻어 라리사 등 테살리아 전역 점령. 테살로니카의 테오도로스, 원정 준비하나 결국 그들과 협상. 마누일이 니케아 대한 복종 버리는 대가로 그를 보데나의 영주로 임명.] / 이집트의 알 아딜 2세, 루큰 앗 딘 알 하이자위에 가자 수비 맡김[* 앗 살리흐 아이유브가 이집트 원정 나선 틈을 노려 룸 셀주크 재상 코펙이 그의 속령인 사모사타 점령. 이에 아이유브 측은 호라즘 용병들에게 디야르 무다르 영지 주어 완충지대 삼음 / 헤르만 폰 튀링겐 (변경백 헤르만 1세의 막내아들), 튜튼기사단장 등극 / 피에르 드 비엘르 브리드, 구호기사단장 등극] * 1월 : 앗 살리흐 아이유브, 다마스쿠스 장악 * 3월 : 앗 살리흐 아이유브, 하마의 알 무자파르와 홈스 포위[* 하지만 도중 이집트 아미르들이 아이유브에 개입 요청해오자 먼저 이집트 원정하기로 결정] * 3월 20일 : 교황 그레고리오 9세, 프리드리히 파문. 그에 대한 십자군 선포[* 이에 프리드리히는 시칠리아 왕국 내의 교황 지지하는 성직자들 축출하고 밀라노 포위] / 튜튼기사단장 헤르만 폰 살차 사망 * 4월 : 앗 살리흐 아이유브, 홈스 포위 풀고 나블루스에 이집트 원정군 소집 * 4월 11일 : 몽포르 백작 아모리, 동생 시몽 6세에게 레스터 영지 양도[* 알비 십자군 이끌던 시몽 드 몽포르가 사망한 후 몽포르와 툴루즈 백국 계승한 아모리 드 몽포르가 1224년 프랑스 왕실에 툴루즈 넘기는 대가로 몽포르가 백작국으로 승격되어 백작위 유지. 한편 1230년 숙부 몽모렌시에 이어 프랑스 대원수가 되자 모친에게서 상속받은 잉글랜드의 레스터 영지를 유지할 수 없게 되어 동생 시몽에게 넘겨 분산 통치하기로 한 것. 다만 9년간 끌다가 드디어 이행] * 5월 13일 : [[티발트 1세|테오발트]], 몽타뮤에서 이단 180명 화형 집행 * 5월 15일 : 루이 9세, 믈랭에서 라틴 황제 보두앵 2세 기사로 서임 * 6월 : 테오발트, 부르고뉴 공 위그 4세, 브르타뉴의 피에르[* 1237년까지 아들 장 1세의 섭정], 아모리, 바 백작 앙리 2세의 십자군 편성 * 6월 20일 : 교황 그레고리오 9세, 탈무드 등 유대 경전들 분서 지시 * 6월 24일 : 테오발드의 십자군 출정 예정일, 기사들 샹파뉴 결집 * 7월 : 테오발드, 십자군과 리옹 방면 남하[* 본래 이탈리아 향하려 했으나 아이유브 측과의 협상 원하던 프리드리히의 반대로 막히자 대신 마르세유와 카르마그의 에그모르트에서 출항 모색] * 7월 5일 : 라틴 황제 보두앵 2세, 용병과 귀로에 오름[* 용병료 마련 위해 가문의 네무아 영지를 5만 리브르에 루이 9세에게 매각. 7월 출발해 헝가리, 불가리아 거쳐 육로 행군, 겨울 도착. 한편 보두앵의 용병 대장인 장 드 베튠이 베네치아에서 사망한 후 그의 군대는 흩어짐. 상당수는 교황 조언 구하며 로마 향했고 일부는 밀라노의 롬바르드인들에 가세. 수백명만 베네치아가 제공한 선박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당도] * 8월 : 테오발드, 마르세유 출항 / 앗 살리흐 아이유브, 이집트 침공군 소집[* 보스라와 바알벡의 아미르 앗 살리흐 이스마일에게 파병 요구했으나 군대 모집에 시간이 걸린다며 아들 알 만수르를 선발대와 먼저 보냄. 하지만 이후로도 지연되자 의사 사드 앗 딘 디마슈키를 파견해 이스마일의 의중 파악하려 함. 이를 눈치챈 이스마일의 재상이 사드 앗 딘의 서신 위조해 아이유브 안심시킴] * 9월 1일 : 테오발드, 십자군과 아크레 당도[* 이후 아크레에서 현지 제후들과 회의. 티레 대주교 피에르가 총대주교 대신 주재. 테오발드, 자파와 아슈켈론 거쳐 다마스쿠스 방면 행군 결정] * 9월 28일 : 앗 살리흐 이스마일, 홈스 군대와 다마스쿠스 기습 점령.[* 이스마일, 군대 준비되자 아이유브에게 자신이 떠나 있는 동안 섭정 맡기기 위한다며 아들 알 만수르 귀환 요청하였고 성사되자 홈스 등 시리아 군대와 기습하여 다마스쿠스 점령] 템플기사단장 아르망과 동맹 * 10월 21일 : 앗 살리흐 아이유브, 사촌 앗 나시르에 도움 청하나 오히려 사로잡힘[* 아이유브의 군대 역시 그를 버리자 아이유브는 나블루스에 소수의 호위대와 남겨짐. 케라크의 앗 나시르에게 도움 청했으나 파견된 베두인 부대는 그를 사로잡아 귀환] * 11월 : 콘월 백작 리처드, 노스샘프턴에서 바로 출정 혹은 교황의 그리스 십자군 종군 지시 거부 * 11월 2일 : 십자군, 아슈켈론 성벽 재건 위해 아크레에서 남하 * 11월 4일 : 브르타뉴의 피에르, 무슬림 카라반 기습해 격파. 대거 약탈 후 합류 * 11월 10일 : 케라크의 앗 나시르, 예루살렘 기습 점령. 다윗 탑의 수비대 농성[* 당시 예루살렘에 주둔 중이던 필랑기에리의 이탈리아 병력은 시내 포기하고 성 스테파누스 (다마스쿠스) 문과 다윗 탑 일대에서 저항.] * 11월 12일 : 바 백작 앙리와 부르고뉴 공 위그, 테오발드에 불복. 현지 제후들과 가자 방면 남하[* 바 백작 앙리, 브르타뉴의 피에르의 전공을 넘어서고 싶은 야욕에 가자의 바이바르스가 고작 1천의 군대만을 지니고 있다는 소문을 접하자 테오발드가 합류하기도 전에 부르고뉴 군대 및 시돈의 발리앙, 오도 드 몽벨리아르와 함께 밤을 틈타 출정. 뒤늦게 알아챈 테오발드가 기사단장들과 달려와 말리려 하지만 위그는 그를 겁쟁이라 매도하며 불복하고 진군] * 11월 13일 :''' 베이트 하눈 전투 '''. 알 하이자위, 십자군 격파. 바 백작 앙리 2세와 1천 전사, 아모리 사로잡힘[* 앙리의 군대가 가자 향해 남하하고 테오발드는 도움 필요할 때를 대비해 후방 아슈켈론 주둔. 앙리, 전투에 앞서 베이트 하눈의 모래 언덕에서 휴식 도중 바이바르스의 궁수들이 습격하기 시작. 이에 자파 백작 고티에 (동시에 브리엔 백작 고티에 4세)는 위치가 드러났음으로 철수하자고 충고, 위그와 팔레스타인 제후들은 보병대 두고 도주. 앙리는 보병대와 함께 싸웠으나 압도되어 전멸. 1천 전사하고 아모리 지휘 하의 6백명은 포로로 잡혀 몸값 협상 위해 이집트로 후송됨] * 11월 중순 : 테오발드, 반격 준비하나 현지 제후들의 만류에 아크레로 철수[* 베이트 하눈의 패잔병들이 아슈켈론에 다다르자 테오발드는 반격 주장하나 현지 제후들이 가망이 없으며 바이바르스가 포로들 죽일 것이라며 도움 거부하자 결국 철수] * 11월 17일 : 교황 그레고리오 9세, 콘월 백작 리처드의 십자군 특권 재차 승인[* 6일 후에는 자금 지원 재개. 하지만 며칠전 벌어진 노스샘프턴 사건 모르는 상태 ㅋ] * 12월 6일 : '''예루살렘'''의 다윗 탑, 아크레로 안전 철수 조건에 항복[* 12월 7일이란 기록도. 휴전 종료 100일만에 벌어진 일. 하지만 앗 나시르 역시 예루살렘 지킬 능력이 되지 못하고 프리드리히와의 전쟁 우려하여 다윗 탑과 성벽 파괴하여 무력화시킨 후 철수] * [[1240년]] : 라틴 황제 보두앵 2세, 십자군과 니케아 제국령 투줄룬 점령[* 테살로니카 /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향하는 두 길이 만나는 요충지. 몽골 피해 내려온 쿠만 인들과 함께 공격. 안전 보장 대가로 항복시키곤 도시 폐허화시키고 주민들 동족 그리스인들에게 노예로 팔아버림. 한편 34척의 이탈리아 함대가 니케아 함대 격파. 그럼에도 요안니스 3세는 소아시아에 얼마 남지 않은 라틴 제국령 성채 중 2개 점령하며 보복] 시돈 영주 발리앙 그르니에 사망, 아들 줄리앙 계승[* 연초. 테오발드, 알레포와 다마스쿠스의 분할 위협을 받는 하마의 아미르 알 무자파르와 동맹 모색. 알 무자파르, 사절을 후히 대접하고 기독교로의 개종까지 제안하나 막상 테오발드가 트리폴리 당도할 무렵 위협이 사라지자 협상 지연함 / 룸 술탄 카이쿠스라우 2세, 재상 코펙 암살하고 조지아 여왕 루사단의 딸과 결혼 / 레온-카스티야 군대가 에지카와 루체나 점령 / 라틴 제국의 왕관이 프랑스 당도] * 2월 : 홈스의 아미르 알 무자히드 시르쿠 사망. 아들 알 만수르 이브라힘 계승 * 2월 5일 : 교황 그레고리오 9세, 요크 대주교에게 관할구역 병력의 출정 저지 명령 * 2월 22일 : 프리드리히, 로마 진군. 시민들의 결사항전 자세에 협상 선택[* 프리드리히가 비테르보에서 남하하자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사기 진작 위해 성유물과 로마 한바퀴 순회. 시민들이 항전 결의하자 프리드리히와의 싸움에 십자군 지위 부여하고 이에 장기 포위 우려한 프리드리히 회군. 독일 사제들에게 중재 허락, 교황 측도 협상 위해 요한 콜론나 파견. 하지만 이후 군사적 위협 사라지자 그레고리오 9세는12 프리드리히와의 협정 어기고 교황권 확립 위해 1241년의 공의회 선포, 이탈리아 성직자들을 로마로 소환. 황제와의 신뢰 파기에 질색한 추기경 요한 콜로나 등의 성직자들이 곁을 떠남] * 4월 21일 : 앗 나시르, 아이유브 석방. 다마스쿠스 회복 돕는다는 조건에 이집트 원정 지원[* 이집트의 알 아딜 2세가 아이유브 내주라고 요구했으나 거부하여 서로 충돌, 결국 이스마일의 다마스쿠스 공격 함께한다는 대가로 동맹한 것] * 4-5월 : 라틴 황제 보두앵 2세, 대관식 거행 / 브르타뉴 공 장 1세, 유대인 대한 재판 명령[* 둘다 추정시기. 부활절 전후] * 5월 초 : 테오발드, 하마 측과의 협상 실패하자 아크레 귀환 * 6월 : 아이유브, 동생 알 아딜 2세 폐하고 술탄 등극.[* 이집트 군대가 알 아딜과 그가 총애하지만 악명 높은 환관을 버리자 알 아딜이 항복, 투옥됨. 이후 아이유브는 케라크의 앗 나시르 다우드에게 팔레스타인, 바알벡의 앗 살리흐 이스마일에게 다마스쿠스 양도 / 한편 아이유브의 아들 투란 샤는 호라즘 용병들 날뛰며 분열되어가는 자지라에서 아이유브 패권 유지하려 노력] 앗 나시르와의 약속 폐기 * 6월 10일 : 콘월 백작 리처드, 십자군과 도버 출항. 프랑스 관통해 마르세유 향함 * 7월 23일 : 이스마일, 테오발드 & 템플러 통해 십자군과 동맹. 북부 갈릴리 할양[* 테오발드, 무력의 한계 느끼고 (이집트의 포로들도 고려) 협상 위해 세포리스 진군. 이스마일에게 영토 할양 대가로 군사 원조 제안. 이스마일, 보급품 제공과 이집트 군대의 팔레스타인 진입 저지 대가로 보포르 및 사페드 성채 일대 반환 제안. 그밖에 앗 나시르 수중에 있는 예루살렘, 베들레헴, 나사렛, 나블루스, 가자 등지 점령 승인. 다마스쿠스와 이해관계 있는 템플기사단이 협상 주도해 성사시키고 사페드 성채 취함. 다만 보포르 성채의 아이유브 수비대는 전 주인의 아들 시돈의 발리앙이 당도하자 불신자에게 넘겨줄 수 없다며 입성 거부. 이에 이스마일이 보포르 포위해 항복시켜 발리앙에게 넘김, 다만 그는 접수받고 사망. 이러한 처사에 우마이야 대사원의 카팁 이즈 앗 딘 압둘 살람이 이스마일 비난하며 예배 기도문에 언급 거부하다 체포되고 풀려난 후 이집트 망명] * 7-8월 : 앗 나시르, 이스마일과 알 만수르 및 십자군과 동맹.[* 7월경 이집트에서 돌아온 앗 나시르는 십자군이 나블루스와 요단강 일대 습격한 것 확인. 결국 그 역시 이스마일 및 십자군과 협상] * 9월 : 독일기사단국, 러시아의 프스코프 점령 * 9월 중순 : 콘월 공 리처드, 마르세유 당도 * 9월 17일 : 전 알비 자작 레몽 2세, 카르카손 포위[* 9월 7일이라고도. 아라곤 망명했다가 지원군과 돌아와 프랑스와 맞선 것] * 9월 말 : 테오발드, 예루살렘 순례 후 아크레 떠나 귀국 * 10월 11일 : 콘월 공 리처드, 아크레 당도[* 10월 8일이라는 기록도. 헨리 3세의 동생, 전투 대신 협상 선호. 필랑기에리의 예루살렘 총독 발터 페닝필을 아슈켈론 총독으로 봉함. 프리드리히, 이를 승인하고 카이로에 특사 파견] / 레몽 2세, 카르카손 포위 실패 * 11월 2일 : 호라즘 인들이 알레포 군대 격파[* 이로써 십자군에 반격 가하려던 홈스의 알 만수르는 대신 그들과의 전쟁 나섬] * 11월 16일 : 페르페르투즈 성채, 프랑스에 항복[* 성주 기욤이 주군 레몽 2세의 카르카손 수복 실패에 비관하여 항복한 것] * 12월 6일 : 바투 칸, 키예프 함락. 주민 대부분 학살됨 * 12월 14일 : 브르타뉴의 피에르, 아크레 떠나 귀국 * [[1241년]] : 부르고뉴 공 위그, 아슈켈론 요새화 후 귀국 / 홈스의 알 만수르, 히신 카이파 제외한 자지라 정복[* 연초. 룸 술탄 카이쿠스라우 2세, 아이유브 내분 틈타 디야르바크르 항복시킴. 하지만 자칭 예언자 바바 이샤크가 이끄는 튀르크멘의 반란으로 한동안 레반트 개입 못함, 진압 위해 프랑크인 용병까지 고용 / 테살리아의 마누일 앙겔로스 사망, 조카인 에피로스 친왕 미카일 2세가 점령. 한편 테살로니카의 섭정 테오도로스는 니케아의 요안니스 3세의 초청받아 극진히 대접받으나 인질됨. 요안니스는 라틴 황제 보두앵 2세와 2년간 휴전 합의하고 테살로니카 원정 준비 / 여름. 시리아의 아이유브 제후들이 호라즘인들의 침공이라는 공동의 적 앞에 동맹 / 독일기사단국, 노브고로드 공국으로부터 핀란드만의 잉그리아 정복. 폴란드 제후들 중 원로로서 크라쿠프 지배 중인 슐레지엔 공 헨리크의 요청대로 몽골군에 맞설 지원병력 파견] * 1월 : 알 만수르, 셀주크 연합군과 유프라테스 도하한 호라즘 인들을 추격 * 2월 19일 : 알 만수르, 호라즘 인들 따라잡았으나 군대가 지쳐 섬멸 실패 * 2-3월 : 아슈켈론 협정. 아이유브, 십자군 중립 대가로 갈릴리 동부 양도[* 리처드, 구호기사단 주장대로 아이유브의 사절단과 아슈켈론에서 만나 이스마일의 영토 할양 승인하고 갈릴리 지역 방어 가능하도록 벨부아 성채와 타보르 산, 티베리아스 추가 할양 요구해 성사됨. 헤브론, 가자, 나블루스 등의 전략적 거점들만 무슬림 수중에 남음. 어차피 아이유브가 아닌 이스마일의 영토.. 아이유브 군대 갈릴리 동부에서 철수, 이스마일도 어차피 앗 나시르에 인접한 땅이라 수긍. 그리고 동생 알 아딜 2세의 업적 상쇄 위해 1239년의 포로들 석방하기로. 1187년 이후 처음으로 갈릴리 국경 복구됨. 갈릴리 공 라울의 딸 에시브와 결혼한 예루살렘 섭정 오도 드 몽벨리아르가 티베리아스 재차 요새화, 나블루스 통해 예루살렘과 연계할 수 없어 취약. 템플기사단과 현지 제후들은 주로 동맹 대상이던 다마스쿠스 대신 이집트 택한 것에 불만] * 3월 : 라틴 제국 왕관이 파리의 생트 샤펠에 안치됨 * 3월 18일 : 츠미엘니크 전투. 바이다르의 몽골군, 폴란드 주력군 전멸시킴 * 3월 22일 : 몽골군, 크라쿠프 입성. 시타델 두고 시내 파괴 자행 * 4월 6일 : 리그니차 전투. 바이다르, 폴란드-독일기사단 연합군 대파. 슐레지엔 공 헨리크 2세 전사 * 4월 11일 : 모히 전투. 바투와 수부타이, 벨라 4세의 헝가리 군대 대파[* 테이스 강의 모히 다리에서 벌어진 전투. 함께 참전한 템플기사단의 지휘관 장 드 몽레알이 벨라에게 섣불리 공격을 주장한 결과 대패. 장과 후그린 대주교 전사, 벨라의 동생인 갈리치아 왕이자 슬라보니아 공 칼만 중상 입고 다음달 사망] * 4월 23일 : 십자군-아이유브 포로 교환, 아모리 드 몽포르 석방됨 * 4월 25일 : 알 만수르, 에데사 부근에서 호라즘 인들 격파 * 5월 : 아이유브 휘하 카말 앗 딘, 가자 수복. 나블루스 향하나 앗 나시르 휘하의 알 자와드에 패배, 사로잡힘[* 카말 앗 딘은 알 카밀 대의 재상 파크르 앗 딘의 동생. 하지만 1대 10의 우세에도 이집트 군대는 대패. 한편 이때부터 이스마일은 다마스쿠스의 쿠트바를 룸 술탄 카이쿠스라우 2세의 이름 하에 불리게 함] * 5월 3일 : 콘월 백작 리처드, 아크레 떠나 귀국 / 지즐리오 해전. 제국-피사 함대가 교황-제노바 함대 격파[* 프리드리히, 성직자들이공의회 참석 위해 제국령 통과해 로마 향하는 것 금지. 이에 일단의 주교들이 제노바에서 봉쇄 피하려 해상으로 로마 향하나 프리드리히의 서자 엔조가 습격해 사로잡거나 침몰시킴. 대주교 1명 포함 2천 전사, 18명의 성직자 사로잡힘. 공의회 위한 정족수 확보하지 못하게 되자 그레고리오 9세는 협상 요청하고 피사 파문. 한편 프리드리히는 이 승리가 신의 뜻이라 천명] * 5월 26일 : 푸와 백작 베르나르 2세 사망. 아들 로제르 4세 계승 * 6월 : 시몽 드 몽포르 귀국[* 한편 이스마일과 아이유브의 대립 심해지며 십자군 내부에서도 누구를 지지할지 여부를 두고 갈등. 구호기사단은 이집트의 아이유브, 템플기사단은 다마스쿠스의 이스마일. 필랑기에리의 제국파는 전자, 이벨린파는 후자를 지지하며 파벌화됨. 튜튼기사단은 중립 유지. 현지 제후들이 헨리 3세와 리처드의 매부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를 중재자로서 바일리 임명을 청했으나 프리드리히는 그가 알비 십자군 지도자의 아들이고 사촌인 필리프 드 몽포르 (미래의 티레 영주)가 발리앙 드 이벨린의 외손자인 것을 고려해 거절, 이에 시몽 귀국한 것. 이후 시몽-루이 9세 vs 프리드리히-헨리 3세의 대립구도 형성됨] / 앗 나시르, 아이유브와 휴전 합의. 카말 앗 딘 석방됨[* 사페드 성채 건설에 투입된 무슬림 노예들이 봉기 결심하고 앗 나시르의 장수와 연락하여 도움 구했고 이에 앗 나시르가 다마스쿠스의 이스마일에게 전했으나 이스마일은 오히려 템플러 측에 말해주어 결국 노예들 학살당함. 이에 충격입은 앗 나시르가 다마스쿠스 대신 카이로 측에 동맹한 것이라는 설이 있음 / 루이 9세, 차남 알퐁스의 푸아투 백작위 선포 (18세), 명목상 주장하던 헨리 3세의 동생 콘월 공 리처드 반발. 레몽 7세, 잉글랜드의 헨리 3세와 그의 새아버지 라마르슈 백작 위그 10세 드 뤼지냥, 푸와 백작 로제르 4세 등과 반프랑스 동맹 결성] * 6월 24일 : 불가리아의 차르 이반 아센 2세 사망. 7세 아들 칼리만 아센 1세 계승 * 6월 말 : 앗 나시르, 알 자와드와 다툼. 그를 체포해 바그다드 추방하나 도충 탈출 * 6-7월 : 이스마일, 홈스-알레포-살카드 군대와 앗 나시르 격파. 십자군과 가자 진군, 시리아 병사들 이탈해 철수[* 1240년에 벌어졌다고도.. 빌카 계곡의 히스반에서 앗 나시르 본군 패배시키고 나블루스의 병력 역시 격파. 이후 십자군과 합류해 가자 당도하나 술탄의 이집트 병력과 마주하자 다수의 무슬림 병사들이 이집트 진영으로 이탈 (이스마일이 보인 친십자군적 행보 때문인지)하자 십자군 역시 후퇴. 혹은 패배였다고도. 알 누와이리에 의하면 이 즈음에 이스마일은 십자군과 함께 예루살렘 입성했다고 함. 이스마일 비난하다 다마스쿠스에서 쫓겨나있던 법학자 알 술라미는 재차 감금됨] * 7월 : 레몽 7세, 신앙 입증 위해 카타리파의 몽세귀르 성채 포위 * 7-8월 : 호라즘 인들이 재차 남하, 홈스에서 격퇴됨 / 남아있던 십자군 병력 대부분 귀국 * 8월 21일 : 교황 그레고리오 9세 사망. 교황령 휩쓸던 프리드리히 철수 * 8월 10일 : 포레즈-옥세르-느베르 백작 기 1세, 귀국 도중 카스텔라네타에서 병사 * 8월 22일 : 알 파와르 전투. 앗 나시르, 철수하던 사르카드 아미르 알 무아자미 격파 * 8월 28일 : 몽포르 백작 아모리, 귀국 도중 오트란토에서 병사. 아들 장 1세 계승 * 10월 25일 : 교황 첼레스티노 4세 선출됨 * 11월 10일 : 교황 첼레스티노 4세 사망, 콘클라베 연기됨 * 12월 11일 : 몽골의 대칸 우구데이 사망, '네스토리우스파' 황후 퇴레게네 카툰 집권[* 우구데이가 과음으로 사망하자 황손인 시레문 대신 경교도이자 구유크 낳은 6째부인 퇴레게네 집권하고 쿠릴타이 위해 원정 중인 왕공들에게 귀환 명령. 한편 교황청은 기독교도 황후와 대이슬람 동맹 고려] * 크리스마스 : 바투, 페슈트 점령 후 얼은 다뉴브 건너 부다 점령[* 같은날 라마르크의 위그 10세가 푸아투 백작 알퐁스 대한 봉신 서약 거부하며 모욕. 생통주 전쟁의 직접적 계기] * [[1242년]] : 앗 나시르, 베들레헴 점령. 기독교도 주민 학살, 아이들 인질. 순례단 방해, 이집트 군대와 자파 포위하나 실패[* 예루살렘 왕국의 친이집트 정책에 반발한 템플기사단이 헤브론 공격하자 앗 나시르가 보복한 것. 앗 나시르는 동맹인 술탄 아이유브에게 부탁해 파견된 샴스 앗 딘 시라순쿠르 휘하 2천 기병대와 자파를 포위했으나 포위 장기화되자 아이유브는 후퇴 명령 내리고 이에 앗 나시르도 케라크 회군. 이집트의 카팁에게 보낸 항의 편지 현존. 그 외에도 앗 나시르는 예루살렘과 해안 사이의 길 끊고 순례자들에게 통과세 거둠. 다른 기록에 의하면 순례 후 아크레 귀환하던 기독교도 순례단 학살했다고도 / 마야파리킨의 아이유브 왕공 알 가지를 포위하던 룸 술탄 카이쿠스라우 2세, 몽골군 접근 소식에 아르메니아, 니케아, 트라페주스 등지에 지원 요청 / 포멜른 공 스반토폴크, 독일기사단의 세력 확대 맞서기 위해 프러시아 인들의 봉기 선동. 1244년 승리 전까지 기사단 위협받음, 전쟁 자체는 1250년까지 이어짐 / 기욤 드 샤테누프가 구호기사단장 등극] * 1월 : 바투, 헝가리의 수도 [[에스테르곰]] 점령. 시타델 저항, 시내 파괴 후 남하 * 3-4월 : 알 하이자위, 3천 이집트 기병대와 북진하나 알 자와드와 함께 이탈[* 술탄 아이유브가 알 하이자위에게는 알 자와드를, 알 자와드에게는 알 하이자위를 사로잡으라 명령하였고 이에 둘다 술탄에 반발하여 알 하이자위는 다마스쿠스로, 알 자와드는 아크레로 도주. 동시에 예멘의 라술 왕조가 아이유브 조로부터 메카 빼앗아 수모 배가 됨] * 4월 : 레몽 7세, 재차 충성 거부. 루이 9세, 시농에 군대 소집 * 4월 5일 : 노브고로드 대공 알렉산데르 네프스키, 독일기사단 격파[* 정확힌 기사단 + 에스토니아 보조병. 도르파트 부근 페이푸스 호수에서 전투. 이로써 독일기사단국의 루스 지역 팽창 좌절됨] * 5월 : 바투 칸, 러시아 방면 철수. 사라이 건설 * 5월 20일 : 헨리 3세, 콘월 백작 리처드와 포츠머스 출항 * 5월 28일 : 카타리파, 아비뇨네에서 이단심문관 2명과 그 일행 살해[* 몽세귀르 성채에서 내려온 50여명의 병사들이 자행. 본래 프리드리히, 아라곤, 레몽 7세 등이 함께 움직이기로 했는데 카타리파만 행동 나선 것. 심문관 2명 포함 10여명의 수사들 밤중에 살해됨. 이단 명부 불태움. 이로써 남아있는 카타리파 대한 경각심 불러일으킴. 결국 교회의 요청대로 루이 9세가 몽세귀르 공격 명령 내림] * 7월 21일 : 타유부르 전투. 루이 9세, 잉글랜드-라마르슈 군대 격파 * 7월 24일 : 라마르슈 백작 위그 10세, 루이 9세에게 항복 * 8월 : 알 만수르, 알레포 침공한 호라즘 인들 격파 / 레몽 7세, 알비와 나르본 점령 * 8월 12일 : 카말 앗 딘, 가자에서 병사. 아이유브의 시리아 원정 무산됨 * 9-10월 : 요안니스 3세, 포위된 테살로니카에 테오도로스 파견, 항복 설득[* 봄 무렵 니케아 제국 황제 요안니스 3세의 대 도메스티코스 안드로니코스 팔라이올로고스 휘하 함대가 인질 테오도로스 및 쿠만 용병대와 트라키아 해안 따라 별 저항 없이 테살로니카 포위. 다만 테살로니카 자체는 민관 모두 강력히 저항, 공성병기 부족한 니케아 군대는 도시 봉쇄에 나섬. 이내 요안니스 3세는 바이추의 몽골군이 아르메니아 지나 룸 셀주크 접근한다는 비보 듣고 곧 귀국해야 함을 깨달음. 그럼에도 이 사실을 숨기고 수중의 테오도로스를 테살로니카의 아들 요안니스에게 파견하여 항복 설득하게 하나 테오도로스는 아들에게 기다리면 더 좋은 조건이 제시될 것이라며 항복하려 했던 그를 오히려 만류] * 10월 : 프랑스 군대가 알비와 나르본 점령. 레몽 7세, 루이 9세에게 재차 복속 * 10월 30일 : 템플기사단, 나블루스 습격. 3일간 종교불문 1천 주민 학살, 노약자 노예화 및 대사원 방화 * 11월 : 테살로니카의 요안니스, 니케아 제국에 복속. 황제 대신 친왕 칭호에 만족, 요안니스 3세 철수[* 40일간의 협상 끝에 나온 결과. 이후 요안니스 3세는 니케아로 돌아가 몽골군의 동태 살피는데 주력, 테오도로스는 테살로니카에 남아 재상으로 지낼 수 있게 해줌] * 12월 5일 :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 사망, 아들 [[알 무스타심]] 계승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